하루에 한 동네, 한달 살기하며 파리를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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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고 에펠탑에 조명이 켜지면 파리의 화려한 밤이 시작된다.
해가 저물고 에펠탑에 조명이 켜지면 파리의 화려한 밤이 시작된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다. 2014년 10월, 우리 부부는 프랑스 파리의 10㎡(약 3평)짜리 단칸방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그 좁은 원룸 안에는 침대·옷장·샤워실 그리고 주방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다른 대안이 있었다면 숨쉬기도 버거운 그 집을 당장 뛰쳐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최악일 것 같던 파리에서의 한 달은 우리 인생에 중대한 변화를 안겨줬다.

아내의 파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다리이자, 파리의 낭만을 상징하는 퐁네프 다리. 한 중년 커플이 직접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와 와인을 마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다리이자, 파리의 낭만을 상징하는 퐁네프 다리. 한 중년 커플이 직접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와 와인을 마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파리행 석 달 전부터 나와 종민은 에어비앤비를 통해 서른 명의 호스트에게 연락을 넣었다. 월세 800달러(약 108만원) 이하의 숙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침구 교체, 청소, 조식, 냉난방기 사용 절약 등 집주인의 부담을 줄여줄 테니 방값을 깎아달라’는 제안을 곳곳에 보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개 열에 한둘에게서 승낙을 받았는데, 파리의 호스트는 하나같이 묵묵부답이었다. 방값을 올려야 하나, 숙소를 파리 외곽으로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한 명에게서 답이 왔다.

우리의 숙소는 파리의 부촌으로 소문난 16구에 있는 저택이었다. 16구에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건물이 많았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중년의 여성이 방금 산 따뜻한 바게트와 신문을 옆에 끼고 도도하게 들어설 법한 기품 있는 집이 줄줄이 늘어섰다.

작은 방 안에 2층 침대와 싱크대·옷장·샤워실까지 들어차 있던 ‘하인의 방’.
작은 방 안에 2층 침대와 싱크대·옷장·샤워실까지 들어차 있던 ‘하인의 방’.

한데 우리가 머문 방은 과거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이 살던 세 평짜리 ‘하인의 방’이었다. 이러한 하인의 방은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유학생이나 밤낮없이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는 우리 같은 여행자가 주로 머문다고 했다. 복도에는 사정이 비슷한 방이 4~5개 더 있었다. 그나마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지 않는다는 게 위안이었다.

하인의 방은 천장이 낮았다. 이층 침대에 오르면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당시 우리는 20인치 기내용 캐리어 안에 모든 필요한 물품을 들고 다녔다. 전세금을 빼서 2년간의 세계여행을 떠난지라 살림은 부모님 집 방 한 칸에 욱여넣은 상태였다. 침대에 누우면 한국에 두고 온 짐들이 자꾸 떠올랐다.

오페라 가르니에(2구)의 모습.
오페라 가르니에(2구)의 모습.

가슴이 저릿해 오는 통증의 숙소가 익숙해질 무렵, 나는 이상하리만큼 부족한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작은 집에 사니, 많이 소유할 필요도 없고 불필요한 것들을 들이지 않을 수 있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파리를 떠나온 지 10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지금도 1t 트럭 하나면 집을 옮길 수 있을 만큼만 가지고 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달 살기 하듯 서울 곳곳으로 이사를 한다. 그 3평에서의 경험이 나를 어엿한 미니멀리스트로 키운 것이다.

남편의 파리

세 평짜리 숙소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좁아서 잠자는 것 말고는 달리할 게 없었던 탓에 우리는 파리 교통카드 ‘나비고’를 이용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 동네 저 동네를 누볐다. 그러면서 한 달을 후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우리만의 여행 방법도 고안했다. 이름하여 ‘달팽이 여행법!’.

파리는 하늘에서 보면 달팽이집 같은 모양이다. 도시가 나선을 그리며 20개 구 ‘아홍디스멍(Arrondissement)’으로 나뉜다. 이런 특징을 이용해 우리는 하루에 1구씩 20개 구를 천천히 둘러봤다. 아홍디스멍을 하나씩 정복할 때마다, 여행자에서 현지인으로 젖어 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달 살기가 짧은 여행과 본질적으로 다른 건 이러한 달팽이 여행법 때문이다.

몽마르트르 언덕(18구)에 오르면 파리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18구)에 오르면 파리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각각의 아홍디스멍은 숫자만이 아니라, 분위기도 서로 달랐다. 몽마르트르가 있는 18구는 골목마다 영화 속에서 봤을 법한 분위기를 풍겼다. 4구는 ‘파리의 성수동’이라 할 법했다. 파리의 심장부로 통하는 ‘마레 지구’를 품고 있는데, 개성 있는 편집숍과 카페가 많아 지갑 여는 재미가 컸다.

파리에는 베트남 보트피플(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탈출한 난민)이 정착해 디아스포라 문화를 만들어낸 13구도 있다. 이 동네를 여행할 때는 불타는 식욕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다.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맛을 내는 다양한 국적의 식당이 포진해 있어서다. 은덕과 나도 이곳에서 쌀국수·똠얌꿍·탕수육 등을 배 터지게 먹었다.

루브르궁(1구)에서 열린 파리 패션위크를 목격했다.
루브르궁(1구)에서 열린 파리 패션위크를 목격했다.

한번은 루브르박물관이 있는 1구를 돌아다녔는데, 마침 파리 패션위크가 한창이었다. 행사장으로 향하는 셀럽과 ‘패피(패션피플)’를 수없이 마주치며 내 추레한 행색을 깊이 반성한 날이었다. 결국 나는 다음 날 쇼핑을, 아니 가지고 있던 옷을 리폼하기로 했다. 속옷을 찢어 하얀 티셔츠 위에 패치처럼 덧댄 스타일이었는데, 꽤 그럴듯했다. 하지만 밀린 숙제하듯 파리를 돌아다닌 탓에 기력이 다했는지, 그 멋진 티셔츠를 입자마자 코피를 쏟고 말았다. 파리에 한 달 살며 체력은 바닥나버렸지만, 스무 가지 추억은 생생히 남았다.

☞파리 한 달 살기 여행정보

·비행시간 13시간  ·날씨 봄·가을 추천  ·언어 프랑스어(짧은 실력이더라도 되도록 프랑스어를 연마해 사용해볼 것. 여행자를 대하는 현지인의 태도가 달라진다)  ·물가 마트·빵집 물가는 한국보다 저렴(마트에서 파는 반조리 식품이 가성비 아이템)  ·숙소 800달러 이상(방 한 칸, 중심부에서 30분 내외 거리)

글·사진=김은덕·백종민 여행작가 think-thing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