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89, 91. 암호 같은 ‘주유기 숫자’의 숨겨진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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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어떤 걸로 넣어야 해?”, “아무거나 넣어 싼 거로” 미국 여행이 처음인 A양은 남자친구와 주유소에 들렀다. 한국에도 요즘엔 셀프 주유소가 많으니 기름을 직접 넣어야 한다는 것은 크게 낯설지 않았다. 일단 여행책에서 배운 대로 카드를 사용해 미리 결제 승인을 받았다. 이제 개스를 채우고 마무리하면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던 주유기와는 달리 너무나 많은 용어가 있었고,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87, 89, 91? A양에게 그야말로 멘붕이 찾아온 것이다.

A양처럼 미국 주유소를 처음 찾은 이들이나 미국 운전이 서툰 경우에 주유소에서 헤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유는 주유소와 주유기 주변에 너무나 많은 암호와 같은 번호와 용어들이 있기 때문. 특히 한국과 달리 미국 주유기에는 ’87’, ‘89’, ‘91’ 등과 같은 숫자가 쓰여 있다. 게다가 E85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주유기는 ‘93’과 ‘100’이라는 것도 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엇일까?

숫자는 옥탄가를 뜻한다. 제조사에 권장하는 내 차 엔진에 맞는 연료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쉽게 말하면 이 숫자는 옥탄가를 뜻한다. 휘발유를 사용하는 엔진은 압축 > 폭발 > 배기라는 과정을 거쳐 힘을 낸다. 이때 공기와 연료가 혼합되어 폭발 시점보다 빠르게 불완전 연소하는 것을 자동차 정비 용어로  노킹(knocking)이라고 부른다. 노킹은 엔진 부품 등에 나쁜 영향을 미치며 수명을 단축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불완전 연소를 방지하기 위한 값을 수치로 하여 옥탄가로 나타낸 것이 바로 우리가 주유기에서 보는 숫자다. 일단은 숫자가 높을수록 옥탄가가 높다. 이를 다른 용어로 레귤러(87), 플러스(89), 프리미엄(91 또는 93)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일반유와 고급유로 이를 구분한다. 만약 주유기 기계에서 결제하지 않고 주유소 점원에게 가면 ‘레귤러?’라고 물을 때도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그렇다면 불완전 연소를 억제하는 옥탄가가 높은 것을 쓰는 것이 무조건 엔진에 좋은가? 보통 자동차 제조사에서는 엔진 특성에 따라 사용하는 권장 연료를 밝힌다. 예를 들어 높은 배기량 또는 터보 엔진의 경우는 가능하면 프리미엄 종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이 같은 엔진들은 혼합비, 점화시기 등을 고출력에 맞게 세팅하게 때문에 노킹 저항성이 큰 옥탄가 연료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자동차 경주장 주변을 가면 숫자 ‘100’으로 표시된 연료도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도 E85 연료 주유기가 늘고 있고. 내 차가 이 연료를 사용할 수 있는 엔진이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E85와 같은 숫자를 가진 주유기도 있다. 이 연료는 에탄올 85%에 가솔린 15%를 더한 연료다. 연료로 사용되는 에탄올은 주로 재생가능한 식물자원으로부터 얻기 때문에 바이오 연료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자동차에서 이 E85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FLEX FUEL(플렉스 퓨얼)’ 엔진일 경우에 이 연료를 사용할 수 있다. 보통 렌터카 회사에서 라지 사이즈 SUV를 빌릴 때 플렉스 퓨얼 엔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E85는 일반 휘발유보다 조금 저렴한 가격을 가진다. 그만큼 연료비를 아낄 수 있다.

어떤 연료를 고를지는 소비자의 몫이지만, 자신의 차에 맞지 않는 연료를 장기로 사용하다가는 엔진 수명이 단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주유소에서 볼 수 있는 암호 같은 숫자의 내용을 알고 제조사에 어떤 연료를 권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