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제뉴스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가 자주 등장한다. 중동의 대표 산유국이자 한국의 주요 경제협력 국가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2030년 엑스포 유치 때문에 부쩍 익숙해진 느낌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우디를 잘 모른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한 왕가, 보수적인 종교 관습, 여성 운전 허용 등 ‘이제야’ 일어나는 작은 변화를 가십처럼 소비할 따름이다. 지난달 사우디 관광청 초청으로 사우디 곳곳을 여행했다. 한국의 21배가 넘는 땅 곳곳에 신비한 볼거리가 수두룩했다. 수도 리야드와 제2 도시 제다, 새로운 여행지로 떠오른 알울라와 이슬람 제2 성지 메디나에서 보고 느꼈던 사우디의 매력을 소개한다.
커피와 낙타고기, 아랍 환대의 상징
수도 리야드는 700만 명이 사는 대도시다. 휘황찬란한 테마파크와 99층짜리 마천루도 눈길이 가지만, 사우디를 이해하려면 유적지부터 들러보길 권한다. 먼저 가본 곳은 알 마스막 요새. 1902년 쿠웨이트에 망명 중이던 압둘 아지즈 초대 국왕(왕세자 겸 국무총리인 무함마드 빈 살만의 할아버지)이 병사 63명을 이끌고 이 요새를 탈환한 뒤 여러 부족과 토후국을 정복해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인근 국립박물관에서는 국가 설립부터 석유의 발견 등 사우디의 굵직한 역사를 볼 수 있었다.
리야드 외곽 도시 ‘디리야’는 사우디 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아트 투라이프’ 지구가 디리야 관광의 핵심이다. 15세기부터 사막 기후에 적응하며 발전시킨 건축 양식이 돋보인다. 해 질 무렵부터 은은한 조명이 비추는 밤까지, 시시각각 바뀌는 점토 벽돌의 색채가 아름다웠다. 사우디 정부는 약 20조원을 투자해 유적지를 정비하고 호텔, 리조트 단지까지 조성하는 ‘디리야 게이트’ 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사우디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을 이곳으로 초청해 한국 기업의 개발 동참을 요청했다.
리야드의 전통시장과 호텔, 길거리에서 커피와 대추야자를 자주 대접받았다. 아랍권에서 커피는 환대를 뜻한다. 하여 커피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커피 맛은 옅고 생강의 일종인 카르다몸 향이 진했다. 전통식당 ‘나즈드 빌리지’에서는 낙타고기를 맛봤다. 기름진 소고기 맛과 비슷했다. 낙타고기도 아랍에서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할 때 내는 음식이다.
2000년 시간여행, 나바테아인의 무덤
리야드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2시간 거리의 알울라로 이동했다. 사우디 북서부, 메디나 주에 속한 사막 도시 알울라는 최근 가장 뜨는 여행지다. 오랫동안 사우디 왕가는 선지자 무함마드(570~632) 이전의 역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알울라의 주요 관광자원은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1세기 사이, 나바테아 왕국 시절의 무덤이다. 2010년 ‘헤그라’ 유적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문화재 발굴과 관광지 개발이 시작됐다.
헤그라 유적지로 향하는 길, 차창에 비친 풍경이 미국 콜로라도 고원지대 같았다. 기기묘묘한 바위와 협곡이 한없이 펼쳐졌다. 고대인이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이 하나둘 나타났다. 무덤이라기보다는 정교한 조각품 같았다. 가이드인 누라는 “요르단 페트라를 만든 고대 나바테아인의 무덤이 약 110개 남아 있다”고 말했다. 헤그라는 고대 교역로였다. 하여 그리스·이집트·페니키아 등 주변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돌무덤 파사드만 봐도 그리스의 독수리 문양, 천국으로 가는 계단 장식이 새겨져 있다. 이슬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장식이다.
헤그라 인근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현대 건축물도 있었다. 2019년 완공한 공연장 ‘마라야’다. 아랍어로 거울을 뜻하는 이름처럼 건물 외장이 전부 거울로 덮여 있다. 가로·세로 길이가 각 100m, 높이는 26m에 달한다. 거대한 거울은 주변 바위산을 살짝 왜곡해서 보여줬다. 사막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보다 훨씬 신비로웠다.
쏟아지는 탄성, 별 헤는 사막의 밤
무덥고 건조한 사막에 사람이 살까 싶지만, 알울라 인구는 약 4만 명에 달한다. 대추야자 농장이 있는 오아시스 주변과 올드타운에 주민 대부분이 산다. 올드타운에는 전통 가옥 900채가 그물망처럼 엉겨 있다. 미로 같은 골목을 산책하고 서울 인사동처럼 최근에 조성한 상점가를 둘러봤다. 주변 바위산과 어울리도록 거리를 설계한 점이 돋보였다. 미관을 해치는 에어컨 실외기는 전부 갈색 덮개로 가렸다. 던킨도너츠, 스타벅스 같은 체인점도 튀지 않도록 디자인했다.
알울라는 밤이 더 환상적이었다. 최고의 야경 명소는 52m 높이에 이르는 코끼리바위였다. 코끼리를 빼닮은 바위 앞 야외 카페에 둘러앉아 시시각각 빛깔이 달라지는 바위를 감상했다. 술 생각이 간절한 여행자도 있겠으나, 사우디에서 음주는 절대 금지다. 차를 마시거나 물담배를 피우며 사막의 밤을 즐긴다.
별 관측 투어도 인기다. 알울라 시내 어디에서도 별을 볼 수 있지만, 빛 공해가 없는 외곽으로 나가야 별이 또렷이 보인다. 차로 1시간 거리의 가라멜 지역으로 이동했다. 온갖 모양의 돌기둥이 서 있는 평원 지대 한편에 좌식 소파가 마련돼 있었다. 소파에 몸을 기댄 뒤 고개를 드니 반짝반짝 빛나는 수만 개 별이 보였다. 여자 가이드가 낭랑한 목소리로 별자리를 설명하는 모습이 ‘알라딘’의 한 장면 같았다. 별 이름의 40% 이상이 아랍에서 기원했다는 설명도 흥미로웠다.
“유목 생활을 한 우리 조상에게 별은 정말 중요했습니다. 여러분도 힘들 때 사막으로 가서 밤하늘을 보세요. 모든 답이 거기 있습니다.”
170만명 동시 기도한다, 메디나 사원
성지순례가 아닌 관광 목적으로 사우디 입국이 가능해진 건 불과 5년 전이다. 2019년 9월 관광비자 발급을 시작했다. 국경을 열었지만,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1 성지 메카, 제2 성지 메디나는 무슬림만 갈 수 있었다. 한데 2022년 왕세자가 메디나를 개방하기로 전격 결정했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무덤이 있는 ‘선지자의 사원’은 이슬람 신자가 아닌 관광객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사원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사원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드넓은 마당을 거닐며 규모에 압도당했다. 최대 170만 명이 동시에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 2월 초는 성지순례 성수기가 아니었지만, 세계 각지에서 온 무슬림으로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메디나나 메카로 가려면 홍해 관문 도시 ‘제다’를 거쳐야 한다. 이슬람교 태동 이후부터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져 활기가 넘치는 도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역사지구 ‘알 발라드’가 필수 코스로 꼽힌다. 정교한 문양의 목제 테라스 ‘로샨’을 갖춘 건물이 모인 모습이 단박에 시선을 끌었다. 낡은 주택이 최근에는 세련된 박물관·카페·아트숍 등으로 변신 중이다. 늦은 밤, 관광객과 현지인으로 북적북적한 알 발라드 거리에서는 엄숙함 따위를 느낄 수 없었다. 작은 사원에서 이따금 울리는 기도 소리만이 이곳이 이슬람의 본산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여행정보=사우디를 가려면 관광비자가 필요하다. 사우디 e비자 홈페이지에서 약 19만원(여행자보험 포함)을 내고 발급하면 된다. 이슬람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옷차림을 주의해야 한다. 여성은 어깨와 무릎을 가리는 게 상식이다. 낮 기온이 40도를 넘는 6~9월을 피해 여행하길 권한다. 화폐는 리얄(1리얄 356원)을 쓴다. 상점 대부분이 신용카드를 받는다. 사우디아항공이 인천~리야드, 인천~제다 노선에 각 주 2회 취항한다. 다른 중동 항공사를 이용해도 된다.